노매드랜드

미디어에서 사회적 약자를 다룰 때 힘들고 고된 면모만 보여주는 것도 좋은 게 아니란 걸 안다. 그게 결국 어떠한 편견을 강화시켜 이분법적인 선을 만들어 버리니까.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가 자기 삶을 토닥이는 과정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대자연을 덧대 버리면 주인공보다 대자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주인공의 현실은 너무나도 가난에 직결되어 있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자리를 옮겨 다니는데 거기엔 별다른 상승/하강이 없다는 점도 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과 다른 인물이 유가족으로서의 상실감을 공유하는 끝 장면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이 장면이 초반부에 나왔다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자신을 유가족으로 정체화하는 건, 마치 이 유목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떤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안고 있어서 유목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나? 나한텐 예민한 지점이라 편하게 보기 힘들었다.

더 파더

나는 이 영화가 너무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간 내가 미디어에서 봤던 치매 환자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의 수진처럼 가련하고 애틋한 멜로드라마 주인공이거나, 집안을 좀먹는 골칫거리이자 때로는 그 모습 자체가 희화화되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를 너무 잘한다. 단 한 번도 치매 환자의 시점에서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에 안소니 홉킨스가 엉엉 울 때는 내 마음도 무너졌다. 저 사람 입장에선 너무너무 무섭겠다 싶었고, 나는 나대로 저런 일이 나에게 닥칠까봐 무서웠다. 그런데 “김혜리의 필름클럽” 에서 이 영화를 다룬 에피소드를 틀었다가, 실제로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치매를 앓고 있는 시청자의 사연을 듣게 됐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자기 가족도 아침, 낮, 오후, 저녁 구분을 잘 못해서 저녁 식사까지 해놓고 자꾸 아침인줄 안다고. 그럼 늘 아침 아니라고 정정해 드리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자기가 너무 자기 기준으로 생각했던 거 같다고. 자기는 이 영화가 무섭지 않았고 그저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계기가 됐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사연에서 느낀 아득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내가 치매에 걸리면 어쩌지 하고 불안에 떠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운데,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 지금의 나에겐 불가능한 영역 같다. 언젠가는 가능할까?

프레이밍 브리트니

이런 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게 지친다. 어릴 땐 막연히 섹시하고 핫하고, 주체적이다 못해 버겁다고 생각했던 여성 셀럽이 사실은 도저히 감당 못할 일을 겪고 있었고 나는 그 셀럽을 (얕게든, 무의식적으로든) 소비하면서 그걸 전혀 몰랐다는 전개가,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거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너무너무 열이 받고 이젠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말 바뀌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사람들만 늘어간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릴 떠난다. 그게 너무 무력하고, 그럼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채 더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수면 위로 계속 드러나는 것에서 또 한번 무력하다. 보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끌어온 아티스트를 프로로 대접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셀럽의 뒷면이라고 떠들어대는 것도 짜증나고, 내리막 한번 타면 슈퍼스타의 몰락이라고 렌즈 들이대는 건 저열하다. 전 남자친구에겐 “그래서 너 브리트니랑 잤어 안 잤어?” 를 묻고 브리트니에겐 “너 아직 처녀야?” 를 묻는 건 정말이지 토 나온다. 너무너무 화가 난다. 뉴욕 타임스 같이 저명한 곳에서 이런 다큐를 만들만큼 이 문제가 가시화됐다는 건 그래도 희망적이지만, 아직도 여기까지밖에 못 왔다는 게 화가 나.

공연

헤밍웨이(산울림 고전극장)

소극장 연극을 처음 봤다. 너무 좋아서 또 한번 보러 가야지 생각했는데 이 글 쓰면서 오늘이 막공이었다는 걸 알았다;

헤밍웨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득하게 읽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의 생애를 다루는 이 연극에서는 기시감을 느꼈다. 몰랐는데 헤밍웨이 아주 K-가부장 꼰대 같은 사람이었다. 폭력을 되물림하고, 자기방어에 급급하고, 권위를 세울 땐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자기가 보호해야 할 사람들 앞에선 한없이 비겁한 사람.

그레고리 헤밍웨이의 캐릭터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배우가 인상적이었던 건지, 그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던 건지 구분은 좀 힘들지만 그의 분노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영화에선 분노하고 화를 내는 캐릭터가 나와도 이미 편집으로 정제된 걸 보는 거라 감정이 곧이 곧대로 전달되진 않는데, 연극에선 배우가 눈앞에 있고 무대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니 훨씬 그 감정이 생생하다. 관객으로서 나도 감정 이입해서 화가 잔뜩 나있는데 그 화를 아주 힘있는 대사와 표정으로 대신 전달해주는 게 너무 만족스러웠어. 연극 아주 좋은 컨텐츠인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