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분기 영화/드라마 결산
나기의 휴식
제목만 보고 내가 예상했던 건 일본 특유의 여름 공기가 물씬 느껴지는 상큼쾌청 힐링 드라마였다. 그리고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본 지금 생각하면, 이게 힐링 드라마가 맞긴 한데, 처음 예상했던 그 티없이 맑고 깨끗한 힐링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눈물 쏟을 거 다 쏟고 지저분하게 싸울 거 다 싸운 다음에 찾아오는 후련함에 더 가깝다.
나기의 전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가몬 신지의 행적은 가히 충격적이다. 1화에서 가몬은 나기의 집주소를 몰래 알아내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오고, 말 한두마디로 얼렁뚱땅 화해한 다음 곧장 섹스를 시도한다. 이런 미친 쓰레기를 힐링 드라마의 캐릭터로 내세우다니 도대체 이 수습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아득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정말정말 놀랍게도, 드라마를 중반쯤 보고 나면 이 가몬 신지에게 정이 든다. 아무리 이게 픽션 드라마 라지만 저딴 새끼한테 정이 들다니 시청자로서 자괴감이 느껴진다. 내 생각엔 저 자식 우는 게 문제다. 나기에게 가스라이팅 퍼붓는 거 치곤 본인 멘탈은 약해서, 조금이라도 단호한 말을 듣고 나면 집에 가는 길에 그렇게 오열을 하는데… 울면서 개찌질하게 굴 때 좀 귀엽다. 나중에 가면 ‘저 자식 지가 울 때 좀 귀여운 거 아는 거 같은데?’ 싶을 정도로 자주 운다…
찌질이 울보 가몬 신지 외에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오드리 햅번 마니아 할머니도 나오고, 2000년대 일본 락밴드 보컬 헤어스타일의 옆집 남자도 나오고, 공사 현장 반장님으로 일하는 싱글 맘 굳센 언니도 나온다. 마지막에 캐릭터들이 한데 모여 놀았던 스낵 바는 나도 너무 가보고 싶다.
드라이브 마이 카
“아사코”, “해피아워” 를 통해 좋아하게 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이번 영화는 뭔가, 장치가 굉장히 많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껴졌다. 공부를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영화 같은데 뭘 공부해야 할지는 감이 안 잡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대로 이해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긴 한다. 다시 볼 엄두가 안 나서 그렇지.
이 영화의 확고한 단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무라카미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왜 꼭 섹스를 해야 하며 왜 꼭 아내는 불륜을 하나요? 대체 그게 인간의 삶에 뭐 그리 중요해서?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왓챠를 유유히 돌아다니다 우연히 보게 됐다. 시작한지 1분도 안돼서 안 웃고 버티기 힘든 씬들이 속출하는데, 확실히 한국 로코는 미국 로코의 공식을 수입했을 뿐 진정 골 때리는 로코는 미국이 원조임을 알 수 있다. 무려 줄거리가 “멀리서 지켜만 보며 짝사랑하던 남자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가 되자 입원한 병원에 따라간다음 자기가 약혼녀라고 뻥까고 남자의 가족과 친분을 쌓다가 남자가 성기능에 문제가 있단걸 알고 남자의 동생으로 갈아타서 해피엔딩” 인 로코 드라마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낸시 피멘탈이 각본을 쓴 미국 로코 영화 “피너츠 송” 에는 무려 이런 신이 등장한다. 대사를 못 알아들어도 무슨 얘기하고 있는 건지 한방에 알 수 있다 ㅋㅋㅋ
다큐멘터리의 성격에 맞게 로코 장르에 대한 비판도 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로코를 사랑하는 이유’가 더 길게 설명되는 다큐라 좋았다.
프랑스 영화학교 입시 전쟁
제목 그대로 프랑스 영화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한창 면접관 일에 부담과 혼란을 느끼던 때에 봐서, 심사위원들이 지원자를 합격시킬지 말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대화 주제가 되는 지원자는 상당히 또라이 같은 사람이다. 호의적인 심사위원들조차 ‘걔 입학한다면 개인적으론 말도 섞기 싫다’고 혀를 내두른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인상적인 숏을 찍긴 했지만 그조차 모든 심사위원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어떤 심사위원은 ‘그런 커뮤니케이션 또라이에겐 합격은 커녕 평균 근처 점수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점수를 높게 준 심사위원들은 ‘유별나단 이유로 벌을 줄 순 없다. 제정신이 아닌 감독은 많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학시켰으면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자 그 다음 이어지는 대화가 인상적인데, 점수를 낮게 준 심사위원이 ‘감독은 소통 능력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묻자 점수를 높게 준 심사위원이 ‘그건 감독에 대한 당신만의 정의’라고 칼 같이 자른다. 그리고 예시로 영화 “드라이버”의 감독을 얘기하며, 제작진 전부 촬영장에서 대기 중인데 혼자 장난감 가게에 쇼핑을 다녀오는 또라이지만 그래도 영화는 천재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소위 ‘인성 면접’의 필요성을 전면 부정하는 이 발언이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우리 기준에 안 맞는다고 떨어트리는 건 옳은 일이 아닐 수 있다’는 큰 프레임은 이해했는데 그래도 그렇지 인성 평가를 스킵하다니. 물론 모두가 인성 평가 스킵에 동의를 한 게 아니라 한 심사위원의 의견일 뿐이지만, 어쨌든 이것이 한 사람의 정당한 의견으로 성립한다는 게 신기했다. 영화를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닌데, 어떤 트러블이 있어도 그건 그 사람 스타일이고 (물론 범죄는 아니어야 겠지만) 영화만 잘 만들어지면 된다니… 난 면접관으로서 그런 가치관은 절대 못 받아들일 거 같은데. 이것이 프랑스의 방식?
그나저나 심사위원들 토론 진짜 치열했다. 농담 아니라 저러다 카메라 밖에서 주먹질하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하더라. 난 기 빨려서 못할듯.
리틀 걸
2020년 작품으로 시카고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실버휴고상을 받았다고 한다. 성별 불일치감을 느끼는 어린이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는 2-3살 무렵부터 자기는 커서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어느 날 ‘얘야, 그건 절대 불가능해.’ 라고 말해준다. 그러자 아이는 절망하며 울었고, 부모로부터 꽤 오랫동안 마음을 닫았으며, 부모는 그제서야 이게 잠깐 스쳐지나가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아이는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이 자기를 여자아이로 봐 줬으면 한다. 예쁜 원피스 입고 등교도 하고 싶고, 발레도 여아복 입고 배우고 싶고, 마드모아젤 이란 말을 듣고 싶다. 부모의 바람은 아이가 자기 유년기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걸 이루기 위한 길은 많이 험난하다. 상담을 받고 받고 또 받고, 교장과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아이가 성별 불일치감으로 힘들어 하므로 가정 내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아이를 여자로 대하는 게 바람직하다 - 는 결론을 싸운지 1년만에 학교가 받아들이게 된다. 부모는 “이제 수영복 마음껏 입어도 돼!” 하고 축하해 주지만, 이제 겨우 첫 스텝을 지났을 뿐 여전히 아이의 투쟁은 진행 중이다. 정말 투쟁이란 단어가 적절한데,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가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저 정도로 고생해야 한다는 게 너무 안쓰러웠다. 상담 받을 때마다 눈물을 꾹 참는 게 보여서 더…
최근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오은영 쌤이 성별 불일치감을 보이는 아이에게 ‘남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린 게 트위터에서 잠깐 논란이었다.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퀴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느냐, 이유야 어쨌든 온전하게 아이를 존중하지 않고 교정하는 것 아니냐, 등등 말이 많았다. 나는 그 아이가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대라는 게 자꾸 생각났다. 당사자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한 사람은 퀴어로서의 자신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상성-교정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게.
메이킹 웨이브: 영화 사운드의 예술
- “사람들은 이 영화가 전쟁 영화니까 남자가 사운드를 맡아야 한다고 했어요. 대체 왜요? 참전한 적 있대요?”
- Anna Behlmer; sound effects mixer BRAVEHEART
“뭔가를 이룰 때마다 매번 그렇게 자신에게 부담을 줘선 안 돼요. 자신의 세계를 흔들고 말 테니까요. 그건 또 신경 쇠약으로 이어지겠죠.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일을 못 하겠더라구요. 콘솔 위에 앉아 하염없이 울었어요. 이유는 몰랐어요. 그냥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탓이었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항상 퇴근 후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제 아내인 페기가 저를 환상의 세계에서 끌고 나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죠. 뿌리를 잃지 마세요. 밖에다 심으세요. 좋은 거거든요.
-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행복해하며 살고 싶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행복은 매일의 일상에도 있습니다. 그냥 화요일에 출근해서 자전거가 내는 소리로 행인이 있음을 표현해야 하죠. 그런 업무를 즐길 수 있고 그걸 하루의 일과로 본다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Ben Burtt; sound designer STAR WARS.
112번의 결혼식
영화 감독님이 부업으로 웨딩 촬영 일을 오래 하셨는데, 문득 자기가 결혼식을 촬영해 준 커플들이 잘 살고 있나 궁금해져 다시 찾아가 인터뷰를 한다. 결혼에 대한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달려나가는 내용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는 부부, 없는 부부, 동거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은 부부, 이혼한 부부, 동성혼 법제화 덕분에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된 부부, 결혼을 목전에 앞둔 예비 부부 등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자체로 재밌었다.
데지 미츠 걸
초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너-무-너-무 귀엽다. 그리고 매 화 끝날 때마다 뭐야 이게??? 하고 빵 터진다. 대형 서사 없이도 얼마든지 재밌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초단편의 매력이지.
썸네일 이미지에서도 드러나지만 더할 나위 없는 여름 분위기의 작품이다. 오키나와 출신 상큼쾌청 여주인공과 도쿄 출신 무기력 남주인공 합이 괜찮다. 둘을 딱히 로맨스로 엮지 않아서 더 취향이다.
사랑은 꿈과 현실의 외길목에서
201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단편 애니메이션. 첫 대사 임팩트가 너무 강력해서 밥 먹으면서 보다가 뿜을 뻔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로맨틱 코미디 클리셰로 시작해 종잡을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가다가 후반부에서 갑자기 시야를 확 뒤엎는다. 손발 오그라들게 웃긴 동시에 유쾌하고 짠하다.
시바 베이비
밥 먹으면서 볼 가벼운 영화를 찾고 싶었고, 왓챠는 이 영화를 코미디로 추천해 줬다. 소개글만 보고 우당탕탕 코미디 시트콤 같은 걸 상상했는데 (왓챠의 소개글은 “스폰남과 엄마가 마주쳤다. ㅅㅂ 어쩌지?”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이 소개가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너무 체할 거 같아서 구간 점프를 잔뜩 했다. 이건 절대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을 전혀 코미디로 대하지 않는다. 영화의 문법도 호러의 그것에 훨씬 가깝다. 잘 만들어진 영화긴 한데 배신감이 너무 커서 다시는 얼씬도 안할듯…
칠곡 가시나들
늦깎이 한글 공부를 시작한 할머니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목은 꽤 예전부터 여러 번 들었는데 최근에야 보게 됐다. 할머니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깊게 다루지도, 사회적 배경을 파고들지도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편안하고 잔잔한 마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할머니들이 아침 드라마 진지하게 보시는 장면이 제일 웃겼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한글로 시를 쓰신 게 다큐멘터리 중간중간에 등장하는데, “서울아들이 아무 말 쓰지 마라칸다. 할매말 몬 알아든는다고 아무말 쓰지 마라칸다. 에헤이 나도 느그말 모르겠다. 여 오지 마라카까.” 에서 빵 터졌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담긴 유머는 경상도 사람이 아니라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