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에이티식스-

뒤에 언급할 작품들도 다 재밌었지만 올해의 최고를 꼽으라면 에이티식스.

전쟁, 소년병,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등을 다룬다는 점도 일단 취향이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시즌2까지 다 본 지금, 원작 라이트노벨을 사고 싶단 생각이 들진 않는 걸 보니 줄거리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연출. 이 작품의 연출이 너무 좋다. 유사한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겹쳐 보여준다던지, 의도적으로 색을 다르게 사용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던지, 애니메이션보단 영화의 그것에 가까워 보이는 연출이 많았다. 마지막 화에서 검은색이었던 프레임 가장자리가 흰색으로 바뀌면서 순식간에 풍경이 넓어진 듯한 느낌을 준 건 정말 인상적이었다. 서사만으로도 충분히 매력 넘치는 작품인데 연출 덕분에 장면 하나하나가 밀도 있게 되살아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OST. 사와노 히로유키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만든 OST 는 곡이 삽입된 매체를 보지 않은 채 곡만 들어도 세계관이 그려진다. 물론 본인도 그런 장점을 살려서 세계관이 뚜렷한 판타지나 SF 작품 위주로 작업하고 있겠지만 어쨌든 OST 앨범만 들어도 하나의 음악 작품으로서 완성도가 느껴지는 건 대단한 일이다.

전쟁씬을 상당히 많이 보여주면서도 상업적인 쾌락은 거의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다. 시청자는 어쨌든 주인공을 응원할 테니 시원하게 쓸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니즈가 있고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지점도 분명 있을 텐데, 이 작품은 거기서 선을 넘지 않는다. 또 소수 민족 박해라는 복잡한 소재를 다루면서 균형도 괜찮았다. 쉬운 결론으로 매듭짓지도 않고 애초에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작품 안에서 내릴 수 있다는듯 오만하게 굴지도 않는다. 그것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보여준다. 어른들이 이게 맞네 저게 맞네 탁상공론 하는 동안 다시 전쟁터에 나가는 아이들을.

웰메이드 소년만화를 보면 인물들이 늘 성장과 희망을 외치고, 그걸 보는 순간엔 나도 덩달아 성장한 기분이지만 막상 TV 를 끄고 나면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는데 이건 그 반대였다. TV 를 끄고 여운이 더 길게 남았다.

영상연에는 손대지 마!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TV 애니메이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이후로 신작이 나왔다 하면 챙겨보는 감독님이 됐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너와 파도를 탈 수 있다면』,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까지 재밌게 봤고 그 중 감독님의 장점이 가장 멋지게 드러난 건 루의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이 감독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친다. 도무지 가만있는 법이 없다. 늘 팔다리를 길쭉길쭉하게 늘려 현실에선 절대 불가능할 동작으로 뛰거나 날거나 하는데, 영화에선 만들어내기 힘든 이런 씬들을 보면 묘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항상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가져간다. 가령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를 보면 어디까지 주인공이 실제 겪은 일이고 어디부터가 망상의 영역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다 보고 나면 ‘뭔진 모르겠고 정말 재밌는 잔치였어’ 하는 감상이 남는다.

『영상연에는 손대지 마!』 는 아예 메타적으로 애니메이션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었다고 생각한다. 줄거리 자체는 고등학생들의 우당탕탕 영화 제작기인데, 작고 소중한 동아리 예산을 어떻게든 굴려서 영화를 만들어내는 부분은 현실적인 학교물로 보여주다가도 아이들이 영화를 만드는 씬은 전혀 다르게 연출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마치 그 영화 속으로 아이들이 이세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판타지 장르의 배경을 깔아놓고 쭉쭉 전개시킨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재밌는 잔치’를 보여주고, 회차가 끝날 땐 언제 그랬냐는듯 학교로 돌아온다.

아무런 걸림돌 없이 보는 내내 즐거운 애니메이션은 오랜만이었다. 부연설명 없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작품이지 않을까.

체인소 맨

잔인한 것도 성적인 것도 잘 못 봐서 19금은 보통 취향에 안 맞는 편인데, 그런 나의 최애 애니메이션 Top 10 안에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가 든다는 건 진짜 이상한 일이다. 내가 여태 본 모든 미디어 컨텐츠 중에 가장 노골적으로 성적이고 노골적으로 잔인했는데. 도덕이고 클리셰고 다 내던지고 풀악셀 밟아서 부아아앙 하고 달려나가는 그 에너지가 좋았던 것 같다. 단순히 비도덕적인 것과도 좀 다른 게, 비도덕적이라는 건 여전히 도덕이란 기준선이 남아있고 그 중에서 네거티브 방향인 거니까. 근데 데빌맨은 그냥 진짜 막 달린단 말이지…

『체인소맨』 도 결이 상당히 비슷하다. 악마가 종족처럼 존재해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는데, 주인공은 그 악마와 인간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고, 본인은 악마를 죽여야 하는 입장인데 거기에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일단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와 꽤 유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도감과 에너지. 도덕이고 뭐고 난 모르겠다 하고 막 달리는 그 에너지가 정말 낯익다. 장르의 규칙을 따라가는 작품이면 보통 줄거리 흐름과 전개 속도를 봤을 때 아 오늘 중요한 에피소드 나오겠구나 예상이 바로 가는데 여긴 그런 게 없다. 빌드업 과정 없이 그냥 부아아앙 하고 간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모럴-리스가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주인공 덴지의 성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여체에 환장하며 침 질질 흘리고 달려드는 남자 캐릭터, 그간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유머’로 참 자주도 쓰였고 하나같이 거지 같았지만 덴지는 그 카테고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덴지는 제대로 된 사회화 과정을 거친 적이 없다. 공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보호자는 빚만 잔뜩 남기고 죽었다. 얘는 성희롱을 하면 안된다 이전에 식기 쓰는 법도 올바르게 배운 적이 없어서 토스트에 잼 발라먹는 것도 할 줄 몰랐는데 모럴을 배울 수 있었을 리가. 주변 인물들도 덴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하기 보다는 걸어다니는 보험 병기 1로 보는 것에 가깝다. 거기다 덴지의 욕망 대상이 되는 인물들도 딱히 덴지의 언행을 거북하게 여기지 않는다. 각자 자기한테 중요한 게 따로 있기 때문에 덴지를 ‘판단’할 정도의 관심을 애초에 기울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이렇게 한결같이 성욕만 쫓는데 이게 소년 점프에서 연재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그치만 재밌어서 매주 챙겨보는 중.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함께 1~3화를 시청한 후로 나도 최신화를 챙겨보게 됐다. 예전에 『퍼스트 건담』 맛보기 도전한 이후로 처음 보는 건담 애니메이션이다. 친구는 건담 시리즈를 좋아하고 나는 『소녀혁명 우테나』 를 좋아해서 어느 부분이 건담 시리즈의 클리셰이고 어느 부분이 우테나의 오마쥬인지 둘이서 장면별로 뜯어서 얘기하곤 했다. 초반 이후로는 그럴 일이 많이 줄었지만.

이전의 건담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나 아마 이 정도로 여성 비중이 높았던 건담 시리즈는 이게 처음이 아닐까 싶다. 여성 파일럿이 주인공인데 로맨스도 여성 캐릭터와 이어지고, 조연으로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는 하나같이 하남자다.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면 우주제일 하남자 경진대회가 아닐까 싶다. 보통 학원물 애니메이션 이었다면 이 조연 남자 캐릭터와의 관계 정리에 그래도 두 회차 정돈 썼을 텐데 이 작품은 절대 그런 낭비를 하지 않는다. 모든 건 속전속결, 하남자는 빠르게 하남자로 귀결된다. 어쩌면 이 조연들의 역할은 서사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건담 새 기체를 홍보하고 빠르게 사라져 주는 거였던 걸까?

현재는 시즌 1이 마무리 됐고 2023년 4월에 시즌 2가 시작될 예정인데, 시즌 1의 마지막 화가 다소 충격적이었던 탓에 (모두가 예상은 했으나 그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연출이 등장한 탓에) 한동안 갑론을박이 거셌다. 나도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선 내 의견을 명료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요즘은 미디어에서 감정적 자극이 큰 장면이 등장하면 그걸 ‘맵다’고 표현하고 그런 ‘매운’ 서사가 서브컬처의 흥행 열쇠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모두가 그런 고자극 서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건 나쁘게 표현하자면 편안하고 안정적인 서사를 즐기던 사람들의 뺨을 난데없이 후려치는 것에 가깝다. 시즌 1의 마지막 화는 매워도 너무 매웠기 때문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비판은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반전(反戰)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기 위해 이런 장치를 썼겠거니 짐작은 하지만, 애초에 자본주의 체계에서 상업용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그런 메시지를 어떠한 부산물 없이 전달하는 게 가능한 걸까? 아무래도 시즌 2를 봐야 제대로 된 감상을 쓸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