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부국제 첫 날 이 영화를 야외극장에서 본 게 올해의 손에 꼽을 행운이 아니었나 싶다. 그냥 봐도 좋은 영화지만, 천 명이 넘는 관객들과 같이 경악하고 소리내서 웃으며 이 영화의 감정선을 같이 겪은 게 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그 돌멩이 두 개 등장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느낌의 시퀀스에서 모두가 숨 죽이고 스크린을 바라봤던 게 생각난다.

어머니와의 관계 문제, 속칭 마더 이슈는 이제 다뤄질만큼 다뤄졌고 다른 얘기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너무 좋았다. 정신 못 차리게 하는 B급 감성도 그렇고, 힘으로 지키는 선(善)이 전부인 것마냥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사람의 선한 마음을 믿게 해주는 스토리였다. 키 호이 콴 배우가 연기했던 웨이먼드가 진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게 히어로지, 이게 히어로야.

수프와 이데올로기

제목이 흥미로워서 무슨 내용인지 찾아보지도 않고 예매부터 했는데 막상 가보니 정말 너무, 너무 먹먹해지는 영화였다.

감독 양영희의 어머니인 강정희 씨는 한국 현대사 한복판을 살아온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에 혼란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 왔다가, 제주에서 4.3 을 겪고 다시 일본으로 피난을 갔다. 한국 정부를 도저히 믿게 될 수 없게 된 강정희 씨는 조국에 대한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의 이념을 진심으로 믿었고 남편과 함께 조총련 간부 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 양영희 감독이 일곱 살이었을 때 세 오빠가 모두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갔다. 김일성의 환갑을 기념하는 인간 선물이었다. 그 뒤로 가족은 두번 다시 합쳐지지 못했다.

양영희 감독은 커리어 내내 자신의 가족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가족의 나라』 등. 하지만 어머니가 4.3 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아주 최근에야 알게 됐다. 강정희 씨에게 4.3이란 아직 끝나지 않은, 자식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숨겨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무국적자’로 분류되는 그들의 신분상 한국에는 입국도 어려웠기 때문에 더더욱 현 사회의 여론은 알기 어려우셨겠지. 사실 지금도 우리가 4.3 에 대해 아주 안전하게 애도하고 있느냐 하면…

4.3 에 대해 털어놓고 머지 않아 강정희 씨는 치매를 맞닥뜨린다. 이제 그녀는 북송 사업이라는 단어조차 기억해내지 못한다. 자꾸 문을 열며 죽은 남편을 찾고 북한에 있을 아들들을 찾는다. 이데올로기에 침범만 당한채 저물어가는 인생이 제3자에겐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멈춰있지는 않다. 양영희 감독에게 ‘결혼할거면 미국 남자 안되고 일본 남자도 절대 안된다’고 두고두고 얘기했던 강정희 씨는, 정작 딸이 일본인 사위를 데려오자 마늘을 잔뜩 넣고 푹 끓인 삼계탕을 대접한다. 영화 내내 강정희 씨는 삼계탕을 끓인다. 장모가 사위에게 씨암탉을 잡아주던 옛 풍습의 흔적이 이 가족에겐 남아 있다. 그래서 『수프와 이데올로기』 다.

이렇게 생생한 다큐멘터리엔 무슨 말을 더 얹을 수가 없다. 이 영화 개봉에 맞춰 양영희 감독의 책도 나왔다. 내년에 읽어볼 예정이다.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일본 여행 갔을 때 아이맥스 관에서 봤다. 솔직히 내 일본어가 영화 자막을 실시간으로 읽으며 따라갈 수준까진 아닌데 줄거리가 복잡한 영화가 아니어서 어떻게든 볼 수 있었다. 일본이 문화 강국이라는 말 이젠 좀 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다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RRR』 을 아이맥스로 틀어주는 이곳이야말로 문화 강국이 맞다.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어서 『RRR』 을 텔루구어 버전으로 아이맥스 상영해 달란 말입니다.

그동안 내가 본 인도 영화는 『세 얼간이』 가 유일했고, 그걸 보던 당시엔 연기하다가 냅다 춤추는 문화가 상당히 낯설었는데 이번엔 조금도 그런 어색함이 없었다. 어색함이 다 뭐야. 이게 바로 내가 원한 국뽕이라며 눈물의 기립박수 칠 뻔했다. 아직도 Naatu Naatu 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헤어질 결심

잔인하거나 성적인 걸 잘 못 보는 탓에 박찬욱 감독님 영화에 도전을 못하다가 웬일로 15세 관람가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봤다. 물론 15세여도 여전히 범죄와 피와 스릴러의 향연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훨씬 순한 맛이라 나도 편하게 즐길 수 있었다. 박해일 배우가 내뱉는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에서 오소소 소름 돋았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고작 한 줄짜리 대사인데 어쩜 이렇게 변태 같고 그 와중에 미학이 살아있는 걸까.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사람이 번역기로 대화하는 장면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불연속적인 소통이 오히려 감정선을 더 단순하고 과격하게 만들어주는 느낌.

본즈 앤 올

티모시 샬라메가 피칠갑을 한 병약미남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보러 갔다. 이 감독의 전작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과 『서스페리아』 리메이크 였다는 걸 생각하면 전혀 놀랍지 않은 영화였다. 이 정도로 피칠갑을 할 줄은 몰랐지만. 사실 이 영화의 정말 소름끼치게 무서운 장면은 등장인물들이 인육을 먹을 때가 아니라 설리라는 이름의 할아버지가 나올 때다. 비현실적인 카니발리즘보다는 현실적인 성범죄자가 배는 무섭지. 하 진짜 이런 캐릭터 제발 리얼하게 좀 찍지 마…… 왜 그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