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4분기 영화 결산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올해 본 것 중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에 등장하는 신체 훼손의 강도가 높아서 놀라긴 했다. 누가 이 영화의 장르를 코미디라고 하던데, 이걸 코미디라고 부를 거면 앞에 부연 설명을 많이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왓챠가 『시바 베이비』를 “스폰남과 엄마가 마주쳤다. ㅅㅂ…어쩌지?”라는 한 줄 요약과 함께 코미디로 분류했던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난 그 설명만 보고 『시바 베이비』가 밥 먹으면서 틀어놓고 깔깔 웃을 수 있는 시트콤 영화인 줄 알았지. 정작 뚜껑 열어보니 도저히 밥 먹으면서는 볼 수 없는 스릴러 영화였지만.
월간 자영업자 팟캐스트에서 이 영화를 “블언블한 트친이 자꾸 질척거리고 문 두드리는 영화”라고 표현한 걸 듣고 진짜 한참 웃었다. 맞지… 뮤트하고 블락하고 공론화까지 했는데 새 계정 파서 또 찾아오는 트친 이야기지. 신체 훼손 소재 때문에 각오가 좀 필요하긴 한데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은 더 보고 싶은 영화.
파벨만스
내가 영화를 보고 좋았다고 느낀 온도와 사람들이 극찬하는 온도가 너무 다를 때 살짝 당황스러운데, 『파벨만스』의 경우 아주 확실한 이유가 있다. 내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지금 필모그래피 검색해 봤는데 『마이너리티 리포트』 딱 하나 봤다. 유명한 시리즈는 정말 단 하나도 보지 않았고, 당연히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다. 영화가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오 좋은 영화였어요, 하고 가볍게 박수 짝짝 치고 있는데 옆에서는 사람들이 눈물바람으로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 치는 걸 보는 기분… 언젠가 스티븐 스필버그 특별전 같은 행사를 영화관에서 해 준다면 하루 이틀 할애해서 필모를 약간이라도 훑은 다음에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싶다. 지금은 무슨 말을 써도 겉핥기밖에 되지 않을 듯.
엘리멘탈
엘리멘탈이 2023년 영화였다는 걸 까먹을 뻔했다. 사실 나한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볼 때는 어쨌건 역동적인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들의 귀여움에 빠져서 재밌게 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트친들과는 감상의 온도 차이가 극심했는데,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역시 아시안 가부장제 가정에서 아버지 의견을 여지 없이 한방에 꺾으려면 동네 일대에 홍수 정돈 나야 한다는 거였다. 주인공들이 합심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면모를 보여 주기에 그 홍수는 적절한 소재였지만, 실제 K-딸내미들이 겪는 수난은 그렇게 극적인 사건 하나와 ‘너를 잃을 뻔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 같은 극적인 이해의 선물 세트로 구성되지 않는데.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웨이드가 결국은 엠버의 아버지에게서 승인을 받는 장면도 글쎄,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인계해 주는 연출과 뭐가 다른가 하는 삐뚤어진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굳이 아버지로부터 승인 받지 않아도 엠버는 본인이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나. 결국은 가부장제 정상 가정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끝나는 영화라 그게 아쉬웠다. 물론 처음부터 나 같은 관객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었겠지만.
그리고 웨이드 캐릭터가 너무 귀엽다. 이 영화의 가장 치사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아직도 이 영화에 대한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누가 옆에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라고 외치면 냅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만 치고 싶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냐구요? 그건 이거랑 비슷한 영화 몇 편 더 주시면 그거까지 보고 생각해 볼게요.
오펜하이머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 몇 번이고 물었다. 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재미 있느냐. 친구들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아니. 재밌긴 한데 세 시간은 세 시간이야. 그래서 영화관에 가는 그날까지도 망설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친구들의 말은 정확했다. 재밌다. 근데 세 시간은 세 시간이다. 다행히도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누가 이 주제로 근사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줬다면 그 다큐를 더 재밌게 봤을 거 같다. 강렬한 한 방으로 남는 영화였나 하면 잘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서는 『나의 1960년대』 책을 한 번 더 읽었다. 기술은 정치와 유리된 영역이라고 하는 사람들 전부 잡아다 앉혀서 그 책 읽혀야 돼.
비탈리나 바렐라
영화 잡지 FILO를 구독한 이래 가장 보고 싶은 영화였다. 잡지에서 극찬을 담아 소개했는데 나는 볼 방법이 없고, 대체 어떤 영화길래 이런 평이 나오는 걸까 너무너무 궁금했던 영화. 그러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기회가 닿아서 봤다. 관람을 마친 감상은 이렇다. 1. 이제 그 평론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서 기쁘다. 2. 왜 그런 극찬이 나왔는지 알 거 같다. 빛과 어둠이 압도적이고, 극장에서 몇 번 더 보고 싶다. 3. 졸지 않고 보기 너무너무 힘들다. 눈꺼풀과의 싸움이다. 영화가 내게 시련을 내리는 거 같았다.
제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세요. 커피 세 잔쯤 마시고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어요.
거미집
f(x)의 크리스탈, 정수정 배우의 연기가 정말 놀라웠다. 난 이 분이 연기를 하시는 줄도 몰랐는데 다른 배우 분들께 조금도 뒤지지 않아서 f(x)의 이미지를 떠올릴 새가 없었다. 코미디는 이런 게 코미디 영화지. 보는 내내 ‘미친 거 아냐?’ 하는 감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너무 웃기고 흥미진진한데 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어쨌건 실존했던 시대, 픽션으로 다듬어졌을 뿐 그 당시에 얼마든지 있었던 이야기니까.
영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도 좋았다. 예술 산업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순도 100% 관객으로서 아무래도 예술 분야와 그걸 가능케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낭만, 판타지가 있는데 결국 업이라는 건 어딜 가나 다 얼레벌레 엉망진창이구나 하는 위안이 남았다. 정우성 배우가 등장하는 씬에서 느껴지는 대리 수치도 즐거웠다. 게다가 흐름상 극중극으로 나오는 영화의 엔딩에 대해 기대치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만족스러웠고.
당나귀 EO
뺨을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순수함을 잃지 않은 당나귀의 인간 세상 여행기” 라는 문구와 저런 귀여운 포스터를 달고 홍보하기에 나는 『생츄어리』 같은 다큐멘터리를 기대하고 갔다. “동물 안전과 복지에 무엇보다 신경 써서 촬영했습니다.” 같은 인터뷰 제목을 트위터에서 봤을 때도 뭐 승마 장면 같은 게 나오는데 동물이 무리하는 일 없도록 조심했다는 줄 알았다. 근데 생각보다 폭력 수위가 높았다. 당나귀가 훌리건들에게 구타 당하는 장면은 중간에 눈을 돌렸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 줄 알았으면 미리 심호흡을 하고 갔을 건데.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길가에 웬 당나귀가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그 다음 전개가 저렇게 된다고? 싶은 부분들이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사건의 흐름을 오로지 당나귀 1인칭 시점으로 보여주는 시도 자체가 가치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폭력성이 올라간다. 그리고 의외로 사운드가 강렬했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할아버지. 저는 다시 생각해도 주인공의 판타지 여행기보다 2차 대전이라는 시대 배경, 주인공이 떠나 온 으리으리한 저택과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쪽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 왜가리 포스터도 거진 사기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플라워 킬링 문
세 시간 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영화관에 입장하는 그 순간까지 스콜세지 할아버지 이 러닝 타임은 무리예요 하고 툴툴거렸으나 결국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땐 박수를 치게 된다. 마지막에는 갑자기 라디오 공개 방송 같은 포맷으로 화면이 바뀌며 그간의 세계관에서 서서히 빠져 나오는데, 이 영화가 나를 내버려 두고 가는 방식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나에게 뭘 줬어.” “인슐린!” 파트에서는 땅을 치고 소리 지를 뻔했다. 물론 거기서 어줍잖게 사과했다면 그게 더 열받았겠지. 하지만…
블루 자이언트
재즈가 너무 뜨겁다. 농놀 열정이 조금만 덜했어도 아마 내 다음 덕질은 블루 자이언트였을 것이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초반부 내용에 약간의 각색을 더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참고로 원작 만화는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나온 전권을 사뒀는데 역시나 농놀이 바빠서 한 장도 읽지 못했다. 그냥 적당히 내 취향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다 읽고 음, 정말 재밌었어 하고 덮을 텐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니어서 시작에 큰 각오가 필요하다. 읽고 나면 아마 최소 두 달은 재즈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겠지.
젊음, 열정, 노력과 패기 등등을 다루는 청춘물이라는 점에선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동류인데 퍼슬덩보다는 세계가 좀 더 냉혹하다. 영화관에서 세 번 봤는데 아직도 ‘그’ 장면에서는 눈을 돌리게 된다. 처음 관람할 때는 줄거리를 아예 모르고 갔으니까 오로지 감으로 짐작했다. 이거 왠지 불안하다, 자꾸 저 장소 저런 장면을 보여주는 게 나 왠지 이 다음을 알 거 같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지. 그런데 원작 만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말하길 그 장면은 원작이 한 수 위란다. 어떻게 영상보다 한 수 위일 수 있지. 대체 뭘 보여주길래…
이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하나 같이 웃는 포인트는 3D 애니메이션. 나도 처음엔 풍선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다 빠져서 춤을 썩 신명나게 추지는 못하는 주유소 풍선 인형. 하지만 그 흐느적거림에 웃는 건 잠깐이고 모든 걸 불살라 버리는 재즈의 기개에 눈물 주룩주룩 흘리며 보는 시간이 훨씬 길다. 저도 처음 두 번은 유키코 씨 울 때 같이 울었습니다. 이 모든 건 역시 우에하라 히로미의 OST 덕분.
괴물
트위터에서 하도 이슈가 돼서 (이 영화의 두 아역 배우를 2차 덕질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퀴어 영화라는 건 알고 봤다. 정작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서스펜스가 거의 스릴러 영화의 그것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이게 퀴어 아동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퀴어 아동이 사람 죽이는 이야기인가? 그것도 퀴어 영화긴 하지. 근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런 영화를?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봤다. 그 정도로 초반부에 주인공이 보여주는 면모가 기괴하고 오싹했다. 후반부에는 좀 다른 의미의 긴장감이 감돈다. 서로의 덕질과 영화 감상을 공유하는 친구에게 나는 아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나 사실… 둘이 키스할까 봐 조마조마했어… 아역을 내세운 영화에서 그럴 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랬더니 친구가 짧은 답장을 보내 왔다. 너도? 나도…
줄거리 자체는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누구의 입장에서 서술하느냐에 따라 진실이 달라지는 이런 라쇼몽 스타일의 이야기 구조가, 아주 매끄럽게 잘 만들기는 사실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라스트 듀얼』도 14세기 중세의 마을, 성, 전투를 보여주는 화면이 좋았던 거지 이야기가 좋지는 않았고. 『괴물』도 아리송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어른 등장인물들. 등장인물의 심경에 감정이입이 되기 보다는 네? 여기서 거기로 가신다구요? 싶을 때가 많았고. 하지만 어른들은 죄다 곁가지라고 본다면, 여태 없었던 퀴어 영화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역시나 OST. 사카모토 류이치의 힘이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