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너무 재밌었다. 2024년이 다 지나봐야 알겠지만 올해의 영화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영화의 메인 소재가 되는 ‘추락’ 사건이 굉장히 빨리 일어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하려고 영화 시작하자마자 보여주지? 싶었는데 정말 대단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 (어떤 사건을 바라보며 재구성되는 서사와 그 서사를 들여다보며 재구성되는 서사) 문장 단위로 정돈된 감상을 쓰기가 쉽지 않네. 같은 사건이어도 서술자가 누구냐에 따라 서사는 달라진다는 걸 보여주는 이런 ‘라쇼몽 같은’ 영화들이 여럿 있을 텐데, 적어도 『라스트 듀얼』이나 『괴물』보다는 이 영화의 방식이 더 좋았다. 진실은 저마다 다르다는 걸 보여준 다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영화가 내린 결론 파트가 특히.

주인공이 법정에서 뱉던 대사들을 한동안 곱씹었다. 영화를 보던 당시엔 그 호소력에 빨려 들어가서 힘차게 고개 끄덕이며 봤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마저 굉장히 소설 속 한 장면 같아서. 주인공이 거짓말을 하려고 의도한 게 아니어도, 그녀는 진실로 자기 생각과 당시 사건을 정직하게 말하려고 했어도 직업이 이미 소설가고 서사를 구성하는 사이클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어떤 단어 어떤 문장을 골라야 지금 내 심경을 가장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표현하는 무기인 동시에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이고 사람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행하지 않나. 나를 설명한다는 건 곧 나를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는 의도지. 글을 쓰는 것도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듣게 하기 위함이고…

기회가 된다면 영화를 한 번 더 봐도 괜찮을 거 같다. 각본집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 사고 싶을듯.

파묘

이제는 영화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처럼 배신감에 떨지는 않지만 (다들 이 영화를 보고 그렇게들 좋다고 난리였던 것인가? 이걸 보고?)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 영화가 꿋꿋이 내세우는 민족정신 이야기가 내 입맛엔 정말 안 맞았기 때문에. 일본놈 나쁜놈! 너는 네 의지와 상관없이 이 나라에 속하는 사람이며 우리는 때로 우리 조국을 위해 고난을 견디고 희생하고! 를 읊는 이야기가 저는 좀 아연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카이스트 대학원을 거쳐 유학을 갔다 독일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 캐릭터는 아무리 엑스트라여도 (오히려 엑스트라라서 더?) 내게 어떤 웃음을 줄 수밖에 없었고.

패스트 라이브즈

이제는 이민 2세, 3세의 디아스포라를 그리는 영화들도 하나의 장르로 봐야 하지 않냐는 말이 돌았다. 영화 『미나리』나 『엘리멘탈』을 보면서 이 영화의 타겟 관객층은 내가 아니라고 느꼈듯이 이 영화의 메인 타겟도 아마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굉장히 매끄럽게 흘러간단 말이죠. 호불호를 떠나 분명 나는 이해할 수 없을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기이할 정도로 요철이 없이 매끄럽게 흘러들어와서, 이건 어떤 가공을 거쳤길래 이런 이야기가 됐을까? 가 궁금해지던 영화.

두 사람의 한국어 대사가 네이티브가 듣기엔 상당히 내적 비명을 일으키는 게 많은데 한쪽은 한국어가 서툴고 한쪽은 그 한국어가 서툰 상대에게 맞추고 있어서 이런 투박하고 노골적인 언어가 되는 거 같다. 이건 『헤어질 결심』에서도 맛봤던 전개니까 그러려니 했다. 인연 타령도 그렇고. 로맨스 영화를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내성을 잃었는지 마음에 닿게 감동적이기보다는 로맨스의 틀로 이해하고 관망한 비중이 더 컸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봐서 매끄럽게 받아들여진 건가. 그나저나 유태오 배우의 힘이 너무 강력하더라. 왜 하필 주인공이 어렸을 적 추억을 나누었던 - 주인공이 잘 모르는 한국을 상징하는 - 옛 남사친이 유태오인 것인가. 프레임에 유태오 배우의 얼굴이 잡힐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이 영화의 전개상 두 주인공의 불륜 키스씬 같은 건 나올 리 없는 걸 아는데도 그가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뭔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텐션이라…

개인적으로는 『냉정과 열정 사이』 생각을 많이 했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IF 버전을 본 거 같았다. 어쩌면 같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지.

로봇 드림

이것 역시 확신의 올해의 영화 중 하나. 내 개인적인 부분을 너무 관통한 나머지 객관적인 감상을 쓸 수 없는 서러움을 아십니까. 저한텐 그런 영화였으며. 좀 우울하고 공허할 때 보러 갔어서 더 그랬던 영향도 없지 않겠지만, 후반부에서는 정말 영화관에서 눈물 펑펑 쏟고 나왔다. 후반에서 확실해지는, 이 영화가 정말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물론 매우 좋았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영화 제목에 걸맞게 로봇이 꾸는 꿈들이. 영화를 보다 보면 이게 어떤 패턴으로 돌아가는지 보이기 때문에 머리로는 다음을 예측할 수 있는데도, 로봇의 불안과 외로움과 사랑이 너무 경험해 본 그것이라 도무지 극적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가 없고 모든 꿈이 끝날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되더라. 그리고 긴 한숨을 뱉게 된다. 어떡하지. 저 로봇을 어떡하면 좋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버렸어. 꿈을 보고 있을 땐 꿈이 더 잔인한 줄 알았는데 아냐, 현실이 더 잔인해… 정말 이 사랑을 어떡하면 좋은 걸까요. 블루레이 나오면 구매할 거 같다는 결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졸졸 따라가 극장에서 관람하면서도 역시 『아사코』가 짱이었어 라는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괜찮긴 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매끈하게 잘 만든 예술영화 같았고, 평론가 GV로 관람하면 훨씬 더 잘 이해하며 볼 수 있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난 왜 『아사코』를 잊지 못할까. 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 생각나는 말이 아무것도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