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회고
4년차 개발자의 소회
- 그간 늘 iOS 팀원 수가 둘셋 정도였는데 작년 말에 다섯이 됐고 현재는 일곱.
- 두세명 짜리 팀일 때 팀원에게 필요했던 역량과 일곱명짜리 팀일 때 필요한 역량이 많이 달랐다. 두셋일땐 팀원 모두가 서비스를 구석구석 잘 알아야 했다. 한명만 휴가를 내도 나머지 한명이 다 커버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모르는 코드 빨리 파악하고 빨리 적응하고 임기응변 잘하는 그런 게 중요했다. 또 개인이 노를 열심히 저으면 그만큼 배도 비례해서 나아갔다. 그런데 일곱 명이 되니, 각자가 자기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어서 배가 우왕좌왕한다. 어쨌든 다들 서비스 안정성과 코드 품질 개선을 목표한 거니까 영 헛돌진 않는데 두명짜리 팀일 때랑 비교하면 느낌이 많이 다르다.
- 팀에 새로 들어온 분이랑 마찰이 좀 있었다. 내 눈에 그 분은 너무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걸로 보였다. 작년의 내가 그런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가 핫픽스를 여러 방 맞았기 때문에 좀 쫄렸다. 천만 MAU 가 나오는 서비스에서 내 코드 한두줄의 실수로 날아가는 현금이.. 액수를 상상하면 숨이 막힌다. 그 분은 그 분대로 구조개혁을 꺼려하는 내가 꼰대처럼 보였던 거 같다. 일년 내내 그게 고민이었다. 내가 진짜로 꼰대가 되어가나? 하지만 모든 변화에 다 오케이 찬성만 외치는 게 정답은 아닐 텐데, 그 균형점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 어쨌거나 나는 개발 덕후는 아니다. 개발은 그럭저럭 재밌지만, 이걸 위해 나를 불태우고 싶다는 강렬한 욕심은 없다. 나는 내가 컨텐츠 비즈니스의 관계자라는 게 좋다. 회사에서 받은 굿즈들을 트위터에 자랑할 때가 제일 재밌다. 만약 우리 회사가 찐 웹툰 덕후들로 가득한 곳이었다면 난 영원히 이곳에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진 않다. 불법 다운로드를 한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사람도 있고.. 보통 개발자는 더 네임밸류 높은 회사, 더 연봉 많이 주는 회사로 건너가려고 이직한다는데 내 목표는 K-컨텐츠-서비스를 다 겪어보는 것에 의의가 있다. 도장깨기도 아니고 좀 웃기긴 하지만.
-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지만 하루에 8시간을 회사에서 생활하는데, 그런 동일시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일하죠.
상담
- 작년 9월에 시작한 상담, 올해 11월에 1차 종료를 했다.
- 작년에 비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남들 눈에 보일만한 변화는 없었을지 모르지만 내 안에선 정말 모든게 달라졌다.
- 초반엔 상담을 받는다는 게 대단히 엄청난 비밀인마냥 모두에게 숨겼다. 나중엔 누가 근황을 물으면 정말 별 거 아니라는듯 상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 바보 같다.
- ‘나는 이렇게 이겨냈어!’를 말하더라도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걸?’ 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미덕에 대해 요즘 고민한다.
TRPG
- 작년 크리스마스, ‘제13시대’ 플레이를 통해 처음으로 TRPG 에 입문했다. 그리고 오늘은 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저녁노을 어스름’을 플레이하고 왔다. Roll20 기준으로 총 플레이 타임 313시간.
- 아주 어렸을 때, 길을 걸어다니며 혼자 중얼중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친구를 사귀는 게 좀 어려웠는데 그와중에 외로움은 타서 ‘다음 번에 누구누구랑 만나면 이렇게 저렇게 상황을 만들어서 대화하고 친해져야지!’ 하는 나름의 예행 연습이었다. 그러니까 1인극이었던 셈이다. 어떤 상황을 가정하고, 이 친구는 이렇게 말을 할 것이고 거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거라는 짤막한 시나리오를 혼자서 중얼중얼. 어릴 땐 그 이상한 버릇 좀 고치라고 혼도 많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서사 만들기를 좋아했을 뿐인데….
글쓰기
- 올해 일년간 하마글방에서 쓴 글을 다 모아놓고 보니 우와 나 매달 리즈 갱신했네 하는 감상이 남았다 ㅋㅋㅋㅋㅋ 정말 매달 벽 하나씩 깨부순 느낌
- 모임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같이 스터디하는 모임도 있고 같이 게임하는 모임도 있고 같이 책읽는 모임도 있고. 근데 그 중에서도 같이 글쓰는 모임은 유달리 특별한 거 같다. 몇년씩 알고 지낸 친구보다 한달동안 함께 글쓰기한 사람이 더 애틋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히려 요즘은, 몇년씩 알고 지낸 그 친구들에 대해 내가 과연 뭘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고받은 말은 분명 많았는데. 무슨 감정으로 무슨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뭐든 기록을 남겨둘걸, 하고 이제 와서 아쉽다. 글방 친구랑은 비록 만난 시간은 짧아도 상대가 써온 글만큼은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상대도 내가 쓴 글만큼은 나를 알 것이다.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묘하게 거기서 위안을 받는다. 나의 어떤 편린을 알아주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으며, 그 편린이 아주 성실한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거.
- 글쓰기 하다보니 픽션 쓰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해 보인다. 대체… 어떻게 소설을 쓰세요? 진짜 너무 대단하시다..
새로운 입덕
로드 오브 히어로즈
국산 RPG 게임인데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캐가 전혀 없고 (글래머러스한 여캐는 여럿 있는데 여성 유저로서 역겨움을 느낄 포인트가 제로)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하며 (공식 대사 : “저는, 제 인생 전반에 걸친 경험을 통해 남성 쪽에 가까운 정체성을 형성했죠. 사실, 아직도 완전히 어떻다라고는 말하기가 어렵군요.”) 소수 민족 박해도 다루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바깥에 위치한 캐릭터도 나오고 노년 여성 캐릭터도 나오고.. 다양성 좋아하는 사람은 감동의 눈물 흘릴만한 게임. 얼마 전에 엘리트 모드 1부 스토리가 공개됐는데, 와 정말 정복전쟁 하는 군주 캐릭터로 이 정도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다. 제발 게임 제작 비하인드 좀 보여줬으면. 제가 개발자로서 궁금해서 그럽니다..
태민
말해 뭐하겠습니까. 전 요즘 샤이니 멤버들 인스타를 전부 구독하고 (정작 내 인스타엔 새 게시물 안올린지 일년 다 되어가는데) 브이라이브 하면 다 실시간으로 보구요. 탬니 버블도 구독하구요. 메시지 올 때마다 찐하게 과몰입 하면서 아이고 탬니야 ㅜㅜㅜ 하고 답장합니다. 분명 태민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왜 이렇게 연하 같을까요. 이게 다 누너예 때문일까요? 그래 네가 누나라면 나는 누나다.
웹소설도 그렇고 케이팝도 그렇고, 이 분야를 파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온도차가 상당히 심한 것 같습니다. 안 파는 사람은 이런 장르에 거리를 둡니다. 웹소설 제목을 몇 개 일러주면 야 난 그런 제목의 글은 도저히 못 보겠던데; 하는 반응이 돌아오고 케이팝 그룹을 얘기하면 요즘은 그룹이 너무 많아서 구분도 잘 안간다는 대답이 나오고. 그냥 잘 모른다, 정도가 아니라 그쪽 세계의 사람을 난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반면 파는 사람은? 파는 사람은 늘 지나칠 정도로 진심입니다. 이걸로 하루종일 수다떨며 놀 수 있고 세상이 무너졌어도 버블 메세지 하나면 도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이겠어요?
그 외
- 링피트 어드벤처 모드 엔딩 봤다!
- 친구랑 선형대수학 개론 공부를 다시 해봤다. 지금 내 커리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다시 공책에 수식을 쓰고 계산하고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