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 20대를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다. 지난 1년간 - 그리고 최근까지도 - 친구들을 만나면 건강 이야기를 한다. 이제는 옛날만큼 많이 못 먹고, 옛날만큼 술도 많이 마시기 힘들다. 옛날만큼 몸이 버텨주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해도 끝은 ‘나이 먹어서 그래’로 귀결된다.
- 신체적 최절정기는 이미 지났다. 주변에서 너 아직 어리고 뭐든 다 해 볼 수 있는 나이고 지금 해봐야 한다 조언해 줄 때는 왜들 저렇게 청승인가 싶었는데, 아주 당연하게 내 것이라 생각했던 여러 요소들이 사라져가는 걸 느낀다. 수학 전공을 포기한 것에 미련이 남아서 교과서 붙들고 다시 공부를 시도 했었는데, 수학과 입학했던 당시의 잘 단련된-쌩쌩한-두뇌는 다시 만들기 어려운 자원이었다.
- 옛날 기준으로 생각하면 뭘 해도 실패가 된다. 옛날엔 1인 1치킨 얼마든지 가능했는데, 옛날엔 먹고 바로 자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etc. 또래 친구들과 모여 찡찡 타임을 갖는 건 공감대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내 어려움을 다뤄내는 건 결국 내 몫의 일이다.
- 한꺼번에 빡세게 많이 하던 패턴을 버려야 한다. 밤샘공부로 기말고사를 이겨내던 기억은 모두 폐기처분 해야 한다. 이제는 은은하게 오래 하는 패턴으로.
방송대 편입
- 은은하게 오래오래 사는 인생은 사실 재미가 없다. 끝내주는 희열도 없고 스트레스 진하게 받는 굴곡도 없고. 어쩌면 행복한 인생이란 좀 재미 없는 인생일 것이다.
- 내 나이 대에서 인생의 굴곡을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루트는 연애-결혼-육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기엔 흥미가 없다. 가끔 외롭기는 하지만 연애 기회를 적극적으로 물색할 정도는 아니고, 내 인생에 대한 결정은 나 하나만 고려하면 된다는 그 안정성이 좋다. 경상도 말로 ‘지 팔 지가 흔들며 산다’는 그거.
- 연애-결혼-육아 루트를 타기는 싫지만 이 나이에 벌써 잔잔한 노년의 삶을 살기도 싫다. 오만한 소리지만 나 도전과 굴곡이 좀 필요해. 그리고 개발 관련된 굴곡은 회사에서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직까지 개발은 내게 업무의 영역이지 취미는 아니다.
- 결국 해본 가락을 못 버리고 공부로 귀결됐다. 2021년에 3학년으로 편입해서 두 학기를 마쳤다.
- 분명 시작은 퇴근 후 일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소일거리 였으나 하다 보니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더라. 시험 스트레스는 여전히 스트레스다. 아무리 여기서 받는 평점이 내 커리어와 전혀 상관이 없고 중요하지 않아도!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나는 잠을 쪼개 가면서 공부를 한다.
- 다행히 2학기부터 형성평가 비중이 크게 올라가면서 기말고사에 대한 부담이 줄었다. 하루에 강의 하나씩 성실하게 들었다면 기말을 망쳐도 버틸 만하다.
-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해소하기에 방통대가 정말로 적합한 솔루션 이었나? 그건 1년 내내 고민이었고 아마 졸업할 때까지도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요즘은 도돌이표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개발
- 기술을 깊게 파고 들지 않아도 인기 있는 서비스의 바퀴를 갈아 끼우는 일은 나와 잘 맞는다. 서비스가 커질 수록 개발자는 신중해야 한다. 고려할 것도 많고, 개발 면에선 A 가 맞지만 사업/기획 측면에선 B 가 맞아서 B 를 택할 때도 생긴다. 나는 그 중간에서 ‘이러이러한 한계 조건이 있을 때의 최적의 솔루션’을 찾는 과정이 좋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반드시 기술적인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좀 그런 사람이다.
- 하지만 서비스 개발 외의 분야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건 아직 모른다. 나는 만 5년의 경력동안 오로지 서비스 개발’만’ 해봤다. 새로운 경험을 쌓고 나면 나에 대한 정의는 다시 바뀔 수 있다.
- 솔직히 대기업 품은 안락하다. 내가 맡은 개발 업무 외적인 일은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직장 타이틀 갖고 부모님과 입씨름 할 필요 없다는 것도 무시 못할 포인트다. 그래서 이직을 생각할 때면 방어 기제가 발동된다. 흠… 굳이? 거기가 반드시 여기보다 더 좋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 하지만 면접은 망설일 이유가 없다. why not?
- 갑자기 팀이 두 배 가까이 커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것 때문에 조직 개편이 된 것도, 거기서 내가 작게나마 파트 리더를 맡은 것도 모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정도 규모 대기업에서 내 연차에 직책을 맡는 건 아마도 드문 일일 것이다. 하지만 4개월 해보니 할 만했다. 의외로 적성이란 생각도 좀 들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기회는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른다. 나는 이걸 파도라고 명명했다. 지금 파도는 나를 어디까지 밀고 갈까. 나는 다음 파도가 왔을 때 얼마나 준비가 되어있을까.
- 덕업일치가 아니라는 걸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나를 속이지는 말자.
- 외부인일 때 오히려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내부인이 되면 말을 허투루 해서는 안되고, 사실 직급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기 전엔 발언을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다. 산업 구조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 상당히 이루기 어려운 목표. 서비스에 대한 애정과 실제 내 업무는 자주 충돌한다.
- 물론 내가 사용하는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렇지만 일은 결국 일이다.
굿즈 할인해 줬으면 생각이 달랐을지도
- 파트 리더도 사실 마찬가지. 그 경험이 어느 정도 사이즈 였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리더 경험이라는 그럴 듯한 단어에 취하지 않기.
- 궁극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게 뭔가. 나는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여성 정체성
- 회사에서 일할 때는 여전히 여성 정체성을 최대한 감추는 쪽이 편하다. 이른바 명예남성. 내가 남자들이랑 뭐가 다르냐, 일할 때 성별이 뭐가 중요하냐, 나는 그저 이 회사에 일하러 온 사람이다.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자.
-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여성 정체성을 숨겨도 타인은 나를 여성으로 읽는다. 시비 걸 때도 꼭 그걸로 건다.
- 사례1. 당신과 일하며 여성 개발자에 대한 편견이 없어졌다
- 사례2. 제가 여직원이랑은 일을 안해봐서 좀 어색하네요 (대체 뭐가)
- 사례3. 여직원들 이랑만 어울려 다니고… 팀에 대한 협력심이 부족한 거 같다 (대체 뭐가)
- 사례4. 원래 그 분(상위 조직장)이 여직원 한테는 좀 너그러워요
- 그런 인간은 내가 자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걸 실력으로 발라버린다는 발상은 속은 시원할 지언정 지속 불가능하고 자기 파괴적이다. 장기적으론 시스템에 기대야 하고, 그런 시스템이 있는 회사가 좋은 회사.
- ‘나 억울하고 힘들고 우당탕탕 하지만 그래도 안 울어요’ 하는 캔디 감성을 지금 연차에 팔면 안 될 거 같다. 이제는 내가 어떠한 발화를 할 때, 그 발화의 궁극적 목표 지점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거 같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 정체성 이라는 소재로 뭘 하고 싶은 걸까. 또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청자는 누구일까.
Next Level
- 6년차 개발자로서 어떤 한 해를 보내고 싶은가. 2023년에는 7년차가 될 텐데 (아찔)
- mid-level 의 여성 개발자로서 해야 할 일이 있을까… 라는 질문은 너무 자아가 비대한 거 같은데… 그렇지만 최근에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생각이 많다.
- 아직도 모르는 거 투성이다. 그런데, 모든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게 나의 목표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어차피 배워야 할 건 매년 생긴다. 아마 10년차가 되어도 ‘큰일났어 6년차 때 질문 잔뜩 했어야 하는데’ 생각할 것이다. 흐름을 즐겨 흐름을
- 꾸준히 건강 챙기고, 방송대 마무리 잘 하고, 영어 공부도 안 끊기게 하고, 쫄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