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대 졸업

  • 이번 달 말에 졸업장이 나온다. 졸업식 공가도 신청해뒀다. 어뷰징으로 보지는 않겠지?
  • 영화 비평 과목도 재밌었고, 한국 고전 문학과 영미시에 대한 지식이 생긴 것도 좋았다. 스스로는 절대 읽지 않을 세계문학 작품들을 여럿 읽은 것도 좋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방통대에서 쌓은 지식보다는 2년 간의 내 삶이 좋았다. 지난 2년간 기말과제 시즌만 되면 노트북과 교과서와 참고도서를 바리바리 싸들고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갔다. 동해는 여러 번 다녀왔고 마지막 학기는 후쿠오카에서 과제를 제출했다. 그 여행들이 하나같이 기억에 남는다. A4 네다섯장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 연습장에 초고를 써가며 끙끙 앓았던 시간이, 고통스러운 동시에 충만했다. 하루를 꽉 채워서 나를 몰아세우는 감각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
  • 2년간 매일매일 생각했다. 나는 이 짓을 왜 하고 있을까. 커리어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재미를 위한 거라면 이렇게까지 애쓸 이유가 없다. 졸업 요건을 챙길 필요도, 휴가를 써가며 기말 고사를 볼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나를 이끄는 동력은 뭘까.

하나의 스포츠로서

  • 얼마 전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을 읽으면서 불현듯 깨달았는데 이 과정이 내게는 하나의 스포츠였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잘하고 즐기는 스포츠. 책에서는 게임이 ‘전 유희적 목표’와 ‘유희적 목표’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전 유희적 목표’는 게임 전체를 통틀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를 말한다. 농구로 치면 림 안에 공을 넣는 것이 ‘전 유희적 목표’가 된다. 반면 ‘유희적 목표’는 게임이 허용하는 규칙 안에서 전 유희적 목표를 달성하는 걸 뜻한다. 농구로 치면 규칙을 지키며 점수를 내는 것이 ‘유희적 목표’가 된다.
  • 우리는 ‘전 유희적 목표’의 가치와 무관하게 게임을 즐긴다. 공을 림 안에 넣는 게 그 자체로도 재밌는 일이었다면 우린 갖은 수를 써서 하루종일 공을 넣고 있었을 것이다. 공을 넣는다는 목표를 기준으로 한다면 농구 규칙을 지키는 건 상당히 비효율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게임의 재미는 바로 그 비효율에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을 지속하기 위해, ‘전 유희적 목표’가 아주 재밌는 일이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우리 스스로를 속인다.
  • 나의 방통대 학위과정에서 ‘전 유희적 목표’는 학위였다. 목표가 있어야 이 과정을 계속하게 되므로 목표를 세웠을 뿐, 사실 학위라는 목표가 내게 중요했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결국 나한테 필요했던 건 자극이다. 명료한 목표를 세우고 거기 도달하기 위해 나를 날카롭게 갈아낼 때의 미학.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스릴.
  • 그렇게 생각해보니 2년간 제법 재밌는 스노보드를 탄 기분인 거에요. 아- 재밌었다.

면접관

  • 솔직하게 말해 1년 간의 면접관 경험은 그저 고통이었다. 이걸 통해 내가 성장하지도 않았고 지원자들을 만나는 게 즐거운 적도 없었다. 특히 하반기 신입 공채 기간에는 하루 걸러 면접에 들어가면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 공정함에 너무 집착하지 말걸 그랬다. 지원자에게 해선 안되는 질문을 안 하는 선이면 충분한 것 같다. 그 이상 고민해 봤자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없고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오히려 면접의 본질은 흐려지고 의무감만 남아서 악순환이다. 자기반성은 면접당 1분까지만 해보고 그 뒤론 생각 안 하기가 내년 목표다.
  • 지원자를 꼼꼼하게 평가하는 것에 초점을 두면 스피드 퀴즈를 하게 된다. 이것저것 골고루 물어봐야 판단의 정확성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막상 이것저것 빠르게 다 물어보고 면접 결과를 작성할 때면 의문이 든다. 이럴 거면 그냥 필기 시험을 보지 나는 왜 들어간 거야?
  • 최근 내가 지원자였던 면접을 겪으면서 생각이 좀 정리됐다. 우선 지원자에게 나이스하게 대해주는 건 무조건 플러스다. 지원자도 성인이고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면접관이 나이스하게 대해준다 = 오늘 면접 합격하나 보다! 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면접관이 나이스하게 대해주면 긴장이 풀리고 좀 더 제 실력을 발휘하기 쉬워진다. 면접관의 태도는 그 관점에서 중요하더라. 그리고 면접관은 일방적인 채점자이기 보다 같이 문제를 푸는 사이로 접근하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팀에 합류해서 같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 동료가 됐을 때 서로 어떤 시너지가 날 것인가. 그것만 봐도 성공한 면접이 되지 않을까.

올해는

  • 일과 나를 분리시킬 수 있는 장치를 더 많이 마련해 두고 싶다. 하반기에 야근을 너무 많이 했다. 그 중에 어떤 건 필요한 야근이었고 어떤 건 내 욕심이었다. 야근으로 해결되는 일이어도 야근으로 해결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게 궁극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길일 것이야.
  • 반년 간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한동안 몹시 무기력했다. 2월이 되어서야 뒤늦게 활력이 살아나서 매일매일을 바쁘게 그리고 즐겁게 보내고 있다. 앞으로는 무기력하게 근검절약을 하느니 인생이 즐거움으로 넘치게 흥청망청 쓸려고.
  • 올해는 좀 신명나는 구르기 쇼를 해보자. 성장과 자아성찰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인생을 개그로 채워보자.

etc

  • 연극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게 된 한 해였다. 배삼식 선생님의 『햄릿』 이 여전히 제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어요. 앞으로도 선생님만 쫄래쫄래 따라다니겠습니다. 그리고 강필석 배우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