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할머니의 감기 낫는 법
옛날옛날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초록마을에 홀로 사는 박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박 할머니네 집은 대단히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또 할머니 홀로 지내기에 모자란 것도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을 지주님의 밭에서 일정 부분을 할당 받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월화수목금 매일매일 농사를 짓기란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적당히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나머지는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집 김 영감이 박 할머니를 찾아왔습니다. 김 영감은 가끔 박 할머니와 품앗이도 주고 받던 좋은 이웃이었는데 요근래 소식이 뜸하던 차였습니다. 박 할머니는 예정에 없던 김 영감의 방문이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영감은 자기가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네.”
“아니, 김 영감 이 동네 자리 잡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딴 데를 가?”
“강 건너 당근마을에서 삯을 올려주겠다 하더군.”
“쯧, 그 동네가 요즘 일꾼 땡겨가는 건 들었네. 요즘 다들 난리구만.”
“박 할멈은 옮길 생각 없어? 박 할멈 연차면 슬슬 옮길 때 아냐?”
박 할머니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피했습니다. 당근마을이 삯을 많이 준다는 건 알았지만 박 할머니는 거기까지 가기가 영 귀찮고 피곤했습니다. 그렇지만 피곤해서 안 간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다간 ‘강 건너 당근마을도 제 발로 못 갈 정도로 늙어빠진 박 할머니’라고 소문날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늘 있지. 그래도 당분간은 이 밭에서 구를까 싶어. 아직은 농사 짓기도 괜찮고.”
“그렇구만. 그것도 일리 있네.”
김 영감은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더니 이내 인사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박 할머니도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마을에 정착했다 도로 떠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 영감이 떠나는 뒷모습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김 영감이 떠난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마을에 퍼졌습니다. 마을의 다른 이웃들은 모두 박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물었습니다.
“김 영감 당근마을 간다매. 소식 들었어?”
“들었어. 어제 우리 집에 와서 얘기해 주더만.”
“역시 당근마을이 좋긴 좋은가벼. 내가 건너건너 들었는데, 당근마을은 일년 일하면 세금 안 떼고 큰거 한 장을 준다잖아. 각시탈방에서 다들 그러더라고.”
각시탈방은 동네 어귀에 위치한 사랑방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갈 땐 모두가 각시탈을 쓰고 입장하는 게 규칙으로, 주로 뜬소문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곳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초록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 마을에서도 자주 애용하는 이 지역의 명소이기도 했습니다.
“각시탈방서 나온 말을 믿어? 거긴 지가 큰 거 한 장 받는다고 뻥치는 놈들만 한 바가지여.”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영 없는 소린 아닌 거 같았어. 아이구 좋겠다. 우리 마을도 삯 좀 올려주면 좋겠네.”
“박 할멈은 어때? 옮길 생각 없어?”
“뭐 언젠간 나도 초록마을 뜨겠지. 아직은 잘 모르겠구먼.”
박 할머니는 애꿎은 컵만 들었다 내려놓았다 하며 대충 둘러댔습니다. 다른 할머니들은 그러고도 한참 당근마을의 소문과 최근 농사 시세, 요즘 유행한다는 작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결론 없는 넋두리를 읊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박 할머니도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에구,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대청마루에 앉은 박 할머니는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별은 커녕 달도 흐릿하게 보이는 하늘을 보며 박 할머니는 한참을 앉아 있다, 그만 그 자리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난 박 할머니는 온몸에 열이 올랐습니다. 기침도 나고 으슬으슬 추운 것이 누가 봐도 감기였습니다. 대청마루에서 잤으니 어쩔 수 없지. 박 할머니는 푹 쉬면 낫겠거니 생각하고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감기는 쉬이 낫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리 누워있다간 ‘박 할머니 요즘 소식 안 들리지? 무슨 일 있대?’ 하는 말이 돌 게 뻔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처음으로 찾아간 병원은 짚으로 지어진 아주 허술한 곳이었습니다. 의사는 박 할머니가 감기 증상을 다 말하기도 전에 갈색 빛이 도는 약병을 하나 내주었습니다.
“이거면 될 겁니다.”
“되긴 뭐가 된다는 거요? 나 아직 내 얘기도 다 안 했는데.”
“척하면 척이죠. 요거 한 병 깔끔하게 드시면 다음 날 괜찮을 겁니다.”
아주 미심쩍었지만 할머니는 일단 집에 돌아와 약병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아주 독하고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아니 이 냄새는? 할머니는 낄낄 웃으며 망설임 없이 한 병을 그대로 원샷하고 행복하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박 할머니의 감기 증세는 더욱 심해져 있었습니다.
‘그 놈 아주 훌륭한 돌팔이일세. 늙은이 지병에 술이 약인 건 어떻게 알았지? 감기가 이래 심하지만 않았어도 모른 척 한 병 더 달라 할틴데. 에이 아쉽구먼.’
할머니는 훌륭한 돌팔이의 병원을 뒤로 하고, 연신 기침을 해대며, 이번엔 나무로 지어진 병원을 찾았습니다. 나무 병원의 의사는 아주 상냥하고 친절하게 할머니를 맞아주었습니다.
“할머니, 그게 사실은 마음의 병인 거 알고 계세요?”
“나는 감기가 걸려서 왔는디.”
“김 선생님도 떠나시고 다른 분들도 자꾸 마을 옮기는 이야기를 하시니까,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이 드셔서 그런 거에요. 그게 할머님처럼 감기 증상처럼 나타나기도 해요.”
“그래요? 그래 들으니 또 맞는 말 같네. 그럼 내는 우짜면 돼요?”
“할머니 시간 괜찮으실 때 병원에 찾아오세요. 주 1회 하면 좋고. 약 먹고 수술하고 그런 거 아니고, 저랑 일주일에 한 번 수다 떤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정확한 날짜랑 시각은 이따 나가실 때 데스크에서 알려주실 거에요.”
할머니는 얼떨결에 주 1회 병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무 병원의 치료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나이 때문인지 깨끗이 낫지는 않았지만 열도 슬 가라앉고, 기침도 덜해지고, 그 덕에 할머니는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 병원의 치료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이고 재미없다. 내 인생 얼마나 더 남았을 줄 알고 이 재미없는 일에 시간을 이만침 쓰나. 퍽하면 마음의 병이란다. 곽 할매 이사 가서 섭섭한 얘기는 왜 괜히 꺼내 갖고 또 병자 소릴 듣노. 아이고 피곤타.”
결국 할머니는 어느 날 나무 병원의 주 1회 상담을 빼 먹고 토꼈습니다. 나무 병원의 의사가 할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할머니는 모른 척하고 냅다 뛰었습니다. 얼마나 뛰었을까요. 정신을 차려보니 박 할머니는 담쟁이 덩쿨이 탐스럽게 엉킨 벽돌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어라, 이 집은?
박 할머니는 성큼성큼 걸어가 벽돌집 대문을 벌컥 열었습니다.
“오? 이게 누구야. 박 씨 오랜만이네.”
“하이고 구 씨,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네?”
그곳은 구 영감님네 집이었습니다. 구 영감님은 박 할머니의 몇 안되는 소꿉친구로, 소싯적엔 둘이 짝짜꿍 아니냐며 얼레리 꼴레리 소리를 들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땐 그런 일도 있었지. 박 할머니는 히죽 웃으며 벽돌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여까지 발걸음을 다 하고.”
“아 있었지 있었지. 나 지금 병원에서 도망 나오는 길이다.”
“박 씨 벌써 요양병원 댕겨?”
“아이씨, 그거 아녀. 들어봐봐. 내가 별 일이 다 있었어.”
박 할머니는 그간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구 영감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당근마을에 관련된 온갖 뜬소문과 할머니들의 말말말, 술 주는 돌팔이 의사와 징글징글한 나무 병원 의사 얘기까지. 구 영감님은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씩 웃었습니다.
“박 씨 인생 재밌게 사네. 결국 감기가 잘 안 낫어서 여기까지 온겨?”
“내는 발에 땀 나게 뛰었구만 이게 재밌나? 뭐 한 사람이라도 재밌었음 됐지. 구 씨도 감기 조심해. 이 나이엔 잘 안 떨어져.”
“원래 감기는 옮겨야 낫는다던데.”
“뭐래는겨.”
“진짤세. 떠나는 사람 보면서 헛헛한 마음 드는 것도, 갈피 없는 소문에 피곤한 것도, 다 말로 탈탈 털어내서 남한테 좀 옮겨야 낫는다고. 감기도 간병 봐주던 사람한테 옮겨야 낫지. 거 바이러스라는 게 사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하지 않던가.”
“구 씨 혓바닥 어디 안 갔네. 성질 나쁜 것도 여전하고.”
“나한테 자네 불안한 거 신경질 나는 거 다 옮겨 놓고 할 소린가?”
박 할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구 영감님은 그런 박 할머니의 표정을 보고 껄껄 웃었습니다.
“우리 집에 며칠 있게. 인생 별로 안 길잖나. 내가 또 간병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지.”
결국 박 할머니는 구 영감님네 집에 며칠간 머물렀습니다. 과연, 구 영감님은 기가 막히게 실력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나무 병원을 다녀도 애매하게 낫지 않던 감기가 씻은 듯 나아 모처럼 힘이 솟았습니다. 역시 세 집 중 제일 튼튼하고 끝내주는 건 벽돌집 이었다며, 할머니는 기분 좋게 다시 초록마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