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2)
1편에서 이어지는 내용
견고한 모든 것이 홍보 속으로 사라진다
‘스마트해지기’ 라는 에토스
- 마이크 저지의 영화 “사무실”. 영화 안에서 기업형 커피 체인점의 직원들은 개성과 창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일곱 개의 장식물’을 달도록 요구받는다.
- 일곱 개를 달면 해결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음. 일곱 개만 한 사람은 시키는 것만 하는, 기본적인 것만 하는 사람이 된다. 수행 평가에서 ‘양호’ 등급은 진짜로 양호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아는 것처럼.
- 통제 사회는 이제 노동자들에게 생산뿐만 아니라 정서도 요구한다.
- ‘저희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을 원합니다’라는 메시지. 이건 정말로 업무에 필요한 특성인가? 회사의 미숙함을 직원 개개인의 역량으로 커버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 성취보다 성취의 상징이 더 중요하다
- 신자유주의는 반관료주의, 반스탈린주의를 자처해 왔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목표와 목적’, ‘성과’ 등의 담론은 증가해 왔고, 애초에 정량화하기 힘든 노동 형태를 측정하려니 관리/관료주의가 여전히 필요하다.
- 증권거래소에서 매겨지는 기업의 가치는 실제로 그 기업이 하는 일보다 미래 실적에 대한 직관과 믿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견고한 모든 것이 홍보 속으로 사라진다.
라캉의 ‘대타자’ 개념
- 모든 사회적 장에 전제되어 있는 집합적 허구.
- 장 프랑수아-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유명한 정식화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 = 대타자에 대한 믿음의 포기
- 자본주의 기업들이 사회를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 / 기업들은 사실 무자비하고 부패되어 있다는 널리 퍼진 앎. 이 둘은 공존한다
- 사람들은 (분명히 모순되는)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믿는다. 모순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 그러나 실제로 기업이 나쁘다는 게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생기면 비난받는다. 기업이 나쁘다는 걸 ‘고객’은 알았어도 ‘대타자’는 몰랐기 때문에.
-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카메라의 존재는 촬영되고 있는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여기서 촬영되고 있는 사람이 신경쓰는 건 우리 자신의 욕망이 아닌 대타자의 욕망.
- 리얼리즘을 포착하려고 하면 그때 잡히는 건 하이퍼리얼리즘. 리얼리즘은 늘 새어나간다.
포스트포드주의적 관료주의
- 하급 공무원이 ‘아직 전달받은 게 없어서…’ 라고 둘러대는 것.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 가능한 건 대타자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결정을 언급하는 것.
- 그렇다고 윗사람, 궁극적인 책임 기관에 다다르면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왜냐면 그런 기관은 없으니까. 대타자는 자체로 조우할 수 없기 때문에.
-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어느 누구도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에 개인들은 특수한 몸짓이나 의미하는 바를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었다.”
- 새로운 관료주의는 모든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한 감시관이 되어 자신의 성과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 진짜로 감시자가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감시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감시는 내면화된다.
하나의 현실이 다른 현실과 중첩되는 것을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 자본주의의 영구적 불안정성 속에서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 모종의 비판적 성찰성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고 관료기관의 모든 지침에 냉소적으로 순응하기
-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기 (이게 요즘의 훌륭한 경영!)
- 감사절차를 아주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걸 ‘실제론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대어 60년대 스타일의 자유주의적 자기 이미지를 보존한다. 내적인 태도로는 관료주의적 절차들을 경멸하지만 외적으로는 완전히 순응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
- 어슐러 르 귄의 “하늘의 물레”
- 소급적 작화 : 무의미하거나 모순적인 요소를 변경해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것. 우리는 보통 꿈을 꾸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꿈 내용을 이야기할 때 서사적 검열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의미한 건 빠르게 기억에서 잊혀지고 인상깊은 것만 전달하게 될텐데, 여기서의 생각은 서사적인 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 하지만 꿈뿐만 아니라 깨어있는 경험에 대해서도 우리는 서사적인 검열을 한다. 우리의 인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 닥쳐도 빠르게 받아들이고 봉합한다.
- 망각은 하나의 적응 전략이 된다. 주인공이 기억 장애를 겪는 픽션 작품이 등장하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음. ex) 메멘토, 이터널 선샤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는 방식
- 꿈 작업 (dreamwork). 꿈을 꿀 때 우리는 망각하지만 망각했다는 사실도 망각한다. 간극과 공백은 말끔하게 메워진다.
- 선택하는 주체와 지배받는 주체는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꿈 작업에 비유하자면, 무엇을 망각할지 선택하는 것도 나지만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도 나이기 때문에.
- 민주주의적 주체들이 정치적 폭정이나 권위주의에 이용될 수도 있다. 이 주체들은 자신이 자유로 오해하는 선택과 욕구 충족의 영역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중앙교환국은 없다
‘큰 정부’라는 유령
- (국민을 챙겨줘야 하는) 보모 국가 개념. 이 유령은 정확히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작동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위해 존재한다.
- 하지만 정부에 초점을 맞추면 비도덕적인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출 때와 마찬가지로 문제를 굴절시키게 된다.
- ‘무능한 정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 –> 총괄하는 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인 층위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 중심없음을 사고하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로 호명되지만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시민인 것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캠벨 로스 “재활용된다고 가정된 주체”
- 오늘날 모두가 재활용을 한다고 가정된다. 정치신념과 무관하게 누구도 이 명령에 저항할 수 없다.
- 그러나 재활용한다고 가정된 주체는 재활용한다고 가정되지 않은 구조를 전제한다. 즉 재활용을 모두의 책임으로 만들 때 구조는 자체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난다.
- 생태 재앙의 원인은 어떤 비인격적인 구조다. 그 구조는 온갖 방식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는 아니다.
기업의 음모
- 자본주의에는 당연히 음모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음모가 작동할 수 있는 건 더 깊은 층위의 구조가 있기 때문.
- 회사의 관리자들을 모두 ‘더 선한’ 사람들로 바꾼다고 사태가 나아지리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구조가 그대로이면 악덕 행위는 재생산된다.
- 관리자 집단을 보호하려 할수록 기업 구조는 이 집단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부재하게 만들며 그들의 관심사가 언제나 전치되도록, 그들이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 기업은 행위자가 아니다. 주체가 아닌 궁극적인 원인, 자본에 의해 제약되어 있는 것이자 자본의 표현.
가끔 회사 앞에서 시위(집회)가 열린다. 집회는 사전에 신고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회사는 집회 일정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럼 집회 당일에는 임직원들에게 전체 공지가 간다. 정문으로 출근하면 시위자들과 마주쳐서 불필요한 충돌이 생길 수 있으니 후문으로 다니라는 내용이다. 그런 알림을 받고도 과감하게 정문으로 가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뭐 때문에 시위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고 지나간다. 회사는 분명 임직원들을 배려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누가 갑자기 붙잡고 ‘너네 회사의 이런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도 직원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한 의도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개발하는 주체이지만 사회적 책임과는 분리되도록,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이유로 기업 구조가 굴절시키는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성급하게 부과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주장하듯 이는 신용 위기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계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활용하고 있는 윤리적인 것의 유혹이다. 이 경우 비난의 대상은 체계 자체가 아니라 이른바 병리적인 개인 및 이들의 ‘체계 남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회피는 실제로는 두 단계 절차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구조는 많은 경우 정확히 그 기업 구조에 속한 개인들이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만 환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남용이나 잔혹 행위의 원인들은 갑자기 아주 체계적이고 곳곳에 편재한 것으로 간주되어 어떤 개인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교착상태 ㅡ 행위에 윤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은 개인들 뿐이지만 이러한 남용이나 잘못의 원인은 기업이나 체계에 있는 상황 ㅡ 가 단지 위장인 것은 아니며 정확히는 자본주의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기관들이 비인격적인 구조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 기업 구조를 벌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스주의적 슈퍼 보모
욕망과 이해관계의 동등성
- 후기 자본주의의 주장. 의무라는 ‘부성적’ 개념이 즐기라는 ‘모성적’ 명령에 포섭된 문화.
- 부모가 아이의 향락을 누릴 권리를 방해하면 마치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 부분적으로는, 맞벌이가 많아지면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기 힘든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억압적 기능을 담당하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 나는 왜 욕망과 이해관계의 동등성이라는 말에서 개발 덕후를 선호하는 IT 업계가 생각이 날까. 나는 돈을 벌려고 회사를 다니는 건데, 회사는 자꾸 직원을 ‘성장하고 싶어하는 개인’으로 호명하면서 네가 성장한 만큼 대접하고 돈을 주는 거라고 말한다. 마치 내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고 있고 회사의 이익은 거기 따라오는 덤인것 마냥… 회사가 지니는 자본주의적/의무적/부성적 측면을 은근히 숨기시는데 전 그게 별로거든요.
아버지 없는 부성주의
- 후기 자본주의는 자신의 금지명령 중 상당수를 건강에 대한 호소로 표현한다. (ex. 흡연이 잘못은 아니지만, 건강하게 살려면 하지 않는 게 좋다.)
-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 말하는 건 ok. 하지만 문화적 개선까지 말하는 건 억압이고 엘리트주의다. 어떤 점에서 엘리트주의인가
- 제3자가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당사자보다 더 잘 알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도 문제지만 (가령 흡연자는 자신의 흡연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았다면 금연했어야 하니까.)
- 더 큰 문제는 특정 유형의 이해관계만이 (건강 등의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이유로) 적절하다고 인정된다는 것.
다큐멘터리 감독 애덤 커티스가 “더 레지스터” 에서 진행한 인터뷰
- TV 는 편집을 통해 모두가 동의하는 감정 형태가 어떤 것인지 부드럽게 암시한다. 드라마부터 리얼리티 프로그램까지 다 그렇다. 도덕성은 감정으로 대체되어 왔다.
- 개인주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내부에 사로잡혀 있다.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송인의 역할은 시청자가 자기 자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 인터넷은 유아론자들의 공동체. 서로의 편견과 가정에 도전하기 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의 상호 수동적 네트워크를 촉진한다.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 등은 반복적이고 기생적이며 순응적인 내용을 생성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성주의적인 것에 대한 미디어 계급의 거부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가득한 상향식 문화가 아니라 점점 더 유아화된 문화를 낳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청자를 성인으로 대하면서 이들이 복합적이고 지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문화 생산물에 대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쪽은 부성주의 문화다. 초점 집단과 자본주의의 피드백 체계가 대단히 대중적인 상품들을 생산할 때조차 실패하는 까닭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는 사람들의 욕망이 이미 존재하지만 그 자신에게 감춰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가장 강력한 형태의 욕망은 정확히 낯선 것, 예상하지 못한 것, 기이한 것 등에 대한 갈망이다.
좌파가 진정으로 재활성화 되려면
- 노동 및 누가 노동을 통제할지를 둘러싼 투쟁. 노동자의 자율성을 단언하고, (포스트포드주의에서 노동의 핵심 특징이 된 과잉 감사와 같은) 특정 종류의 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 관리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 전략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강사와 교사는 파업 전술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는 학생 및 구성원을 다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 공공서비스에서 비즈니스 존재론을 제거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 비즈니스조차 비즈니스로 운영될 수 없는 마당에 왜 공공서비스가 비즈니스가 되어야 하는가?
-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 건강 문제를 실제 원인인 자본에 대한 적대로 전환시켜야 한다.
- 슬라보예 지젝과 슈퍼 보모의 사례가 말해주듯이 무제한적인 방종이 오히려 비참함과 불만을 야기한다면, 욕망을 제한할 필요성은 더더욱 커진다.